나는 교사를 꿈꾼다. 교사란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공리로 삼는 교육학이라는 신념체계의 사제이다. 어떤 것의 내재적 가치라는 것은 그 어떤것과 개념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즉 그 개념과 분리할 수 없는 가치이다. 예를 들어 경찰관이라는 직업과 도둑을 잡는것 그리고 공무원 연금이라는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경찰관이지만, 공무원 연금을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무원 연금 체계가 없는 나라에서는 경찰관이라도 공무원 연금을 받지 않으므로,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어떤 경찰관이 도둑을 잡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라도 그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경찰관이라고 부를수 없다. 우리는 도둑을 잡는 사람들을 경찰관이라고 칭한다. 이것이 경찰관의 내재적 가치이다. 이처럼 어떤 것의 내재적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그 정의의 한 부분으로 포함된 것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교육의 개념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교육의 개념정의가 이루어져서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찾은 이후에야, 교육학이 시작될 수 있다. 이는 마치 인식론을 하기 위해서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인식의 주체, 즉 인식의 시작점을 '의심하고 있는 나'로 찾은것과 비슷한 견지에서의 노력이다. 교육학의 시작점은 교육이므로, 교육이 무엇인지를 우선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교육에 대해서 수 많은 학자들이 정의를 내렸지만, 현재 우리나라와 미국의 교육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교육심리학은 교육을 어떤 일정한 처치를 통해 교육 참여자들의 변화를 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정의 중 대표적인 것으로 정범모의 '인간 행동의 계획적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이 정의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행동이다. 행동은 사고와 달리 관찰 가능하다. 계획이란 어떤 바람직한 방향을 미리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은 교육 이전과 교육 이후에 차이가 있어야 된다는 점을 함의한다. 교육이라는 것은 어떤 이상적인 지향점을 두고 일정한 자극을 통해 그 방향으로 인간의 변화를 꾀하는 것인데, 그 변화는 외부에서 관찰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학업성취도의 향상이라는 목표를 두고, 효과적인 교수방법이라는 자극을 통해 측정가능하고 관찰가능한 학생들의 시험점수가 수업 듣기 전에 비해 오르는것이 이 정의에 부합하는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교육 참여자가 효율적으로 제고된 방식의 교수학습이라는 처치 끝에 시험은 100점을 맞았지만, 그 교육 참여자 스스로 느낄 때에는 배웠던 것이 아무것도 무가치하다고 느낀다면 그 수업은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또 교육의 지향점으로 삼는 바람직한 방향 혹은 가치의 성취를 모두 관찰가능한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어떤 교육 참여자가 다년간의 예술 교육으로 인해 예술을 감상하는 눈이 한층 높아져 이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를 느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인간 삶에 있어서 예술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인간에게 가치있는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술적 심미안이라는 것은 도대체 측정할 방법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즉, 어떤 활동을 통해 배운것이 설령 측정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교육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또 어떤 활동은 분명히 가치 있는 것을 익히지만 그것이 관찰가능하게 측정하기 어려울수도 있으며, 단지 측정하기 어렵다고 이것을 교육에서 제외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교육에 있어서 측정가능성보다는 교육 참여자가 느끼는 '가치'에 중점을 둔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교육에 있어서 가치를 말한 대표적인 학자들 중 피터스를 빠트릴 수 없다. 피터스는 분석철학적으로 교육의 개념을 명료화 한 학자로서, 그는 어떤 것이 교육이라고 불리려면 세가지 준거를 충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첫 번째는 규범적 준거(normative)로서, '가치로운 것'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두 번째는 인지적 준거(cognitive)로서, 교육은 단순히 무언가를 외우는 것을 떠나서 세상을 보는 지적 안목을 형성해야 한다. 세상을 보는 눈이라는 것은 가치 판단을 포함하므로, 이 준거는 규범적 준거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마지막은 과정적 준거(acceptable manner)로서 교육 방법상의 문제이다. 교육은 도덕적으로 온당한, 자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피터스는 교육이란 교육참여자가 자발적으로 가치 있는 것들을 배움으로써 세상을 보는 안목을 형성하는 지적인 과정으로 본 셈이다. 여기서 피터스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의미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가치인것 처럼 보인다. 이 경우, 예술적 심미안이라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비록 측정하기는 어렵더라고 그것을 제고하는 활동은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육이 일어나는 대표적인 장소인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합의된 것들이다. 학교가 이것들을 학생들에게 강제로 주입하려 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온당한 방법이 아니므로 피터스의 정의에서의 교육이라고 부를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학생들에게 외부적 강압을 최대한 소거하여 수업을 진행한다면 어떨까. 극단적으로 가정하여 학교에 와서 교육받는 것을 부모의 압력, 사회의 압력도 없는 전적으로 학생의 자유에 두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도 학교에 나와서 공부를 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리고 그 교육을 통해 자신만의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다면 그 학생이 참여한 수업은 과정적 준거와 인지적 준거를 만족한다. 그렇다면 규범적 준거는 어떨까? 만약 어떤 학생이 자발적으로 어떤 활동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그 활동이 자신에게는 어떠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활동이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회적 가치 역시 지니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자발적으로 공부를 하고 그 결과 자신이 성장했음을 느낀다면, 그 학생은 피터스적 의미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만약 학교가 아닌 곳이라면 어떨까. 교육은 반드시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요요를 돌리는것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요요를 돌릴 때, 생의 환희를 맛보며 살아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요요를 돌리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단순히 애들 장난 쯤으로 치부한다. 그리고 요요를 돌리는 행동이 어떤 지적인 안목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사람은 요요를 돌리는 법을 배우기 전과 배운 후의 삶은 전적으로 달라졌으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피터스적 의미에서의 가치를 단지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것'에 둔다면, 이 사람은 규범적 준거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가치를 '스스로에게 가치있는 것'에 초점을 둔다면, 이 사람의 요요 돌리기와 그것을 배운 것은 규범적 준거를 충족한다. 피터스적 의미에서의 인지적 준거에 의거하여 지식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 사람은 딱히 요요 돌리기를 배우기 전에 비해서 그렇게 많은 지식적인 것을 알게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기고 그 결과 삶의 질이 변화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이 사람은 요요 돌리기를 배움으로써 그것을 배우기 이전과 이후의 삶의 자세와 삶의 방식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았다. 또 그는 스스로 원해서 요요 돌리기를 배운 것이므로, 교육의 과정적 준거도 충족한다. 피터스의 '가치'를 '교육 참여자 스스로 느끼는 가치'로, 피터스의 '세상을 보는 안목의 형성'을 단지 인지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고 좀 더 넓게 확장한다면 요요를 배우는 것도 충분히 교육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스스로에게는 가치가 있지만 사회적으로 가치가 없는, 혹은 악덕한 것에 대해서는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배운다고 가정을 해보자. 도둑질이란 것은 사회에서 용인되기 어려운 나쁜 행동이다. 도둑질을 배우는 사람에게 도둑질이 어떤 가치가 있더라도, 그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그 행동은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행동이므로 이것은 교육의 범주에 넣어서는 안된다. 즉 교육에서 가치 있는 것이란 '스스로에게 가치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회에 적어도 비가치적인것은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공교육으로 조금 더 범위를 좁힌다면, 공교육은 교육 중에서 일부이면서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공교육에서의 가치 있는 것이란 '스스로에게 가치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회에서도 가치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인간은 단지 이성만을 지닌 존재가 아니고 감성도 지니고 있으며, 육체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인지적 가르침이 아닌, 감성적 가르침이 육체의 수련을 통해서도 자신의 삶에 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봉사활동을 통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인생이 성장했다고 느끼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인지적으로 무엇을 배운것은 아니나, 그 사람의 삶은 봉사활동 이전과 이후로 전혀 다르다. 또 어떤 사람이 끊임없는 신체의 수련을 통해 마음도 함께 단련하면서 자신의 삶에 있어서 긍정적인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를 우리는 무도인들에게서 왕왕 찾을 수 있다. 비슷한 견지에서 우리는 체육교육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들 역시 인지적인 발전은 없을지 모르나, 삶에 있어서의 질적 변화는 나타났다. 따라서 우리가 교육이라는 개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지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활동으로 말미암은 '삶의 긍정적이고 질적인 변화'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이 변화를 느끼는 주체는 교육 참여자 그 자신이어야 한다. 물론 이 변화가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의 타인들도 느낄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교육은 변화와 발전을 내포한다. 교육에 참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밑바탕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의도하지 않게 인생의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경험을 하게 되는 상황은 어떻게 해야할까? 가령 어떤 한 벤처기업가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사업에 도전했는데 결국 실패로 끝나고 파산 신청을 해버렸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업가는 사업은 결국 실패했지만,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도전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여러가지 것들을 배웠으며 또 가장 중요한 인생의 쓴맛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사업 실패 이전과는 전혀 다른, 더 발전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 사업 자체를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시도했다기 보다는, 단지 자신의 사업을 성공해서 돈을 벌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그 실패한 사업가는 사업 실패라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실제로 사업을 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여러 가치 있는 것들을 배웠으며, 사업 이전에 비해 자신이 한단계 성숙했다고 느꼈으며, 그 사업 자체를 스스로의 의지로 도전했다. 자발적인 의지로 한 경험이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경험을 제공하였으며, 삶의 질적 변화를 이끌었다. 애초부터 교육적 의도는 없었더라도, 어떤 경험이 교육적 준거들을 충족한다면 그 경험은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잠재적 교육과정이라는 말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잠재적 교육과정이란 의도하지 않았으나 학교 생활을 얻게 되는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애초에 교육적 의도는 없었더라도, 교육적 준거를 충족한다면 그것을 교육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만약 이렇게 교육의 정의를 애초에 교육적 의도를 가지지 않는 경험으로까지 확장한다면, 교육적 의도를 가지고 가르치는 사람인 교사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실패한 사업가가 교육에 참여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교사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교사라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교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대답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교사란 교육 참여자들이 스스로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도록 도와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의도하지는 않았을 수 있지만, 실패한 사업가가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배운 많은 것들은 그 사업가가 누군가 혹은 어떤것과 상호작용하면서 얻은 것이다. 만약 책을 보고 경영학적 지식을 쌓아갔다면, 그의 교사는 그 경영학 책이다. 만약 그 사업가가 고용한 직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인사관리의 중요성을 깨우쳤다면 그 직원들이 그 사업가의 교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우치는것은 초인이 아닌이상 불가능에 가깝고, 결국 그 깨우침을 주기 위한 매개가 존재하게 된다. 그 매개들 중 가장 강력한 것이 교육적 의도를 가진 교사들이며, 따라서 비록 교육의 의미를 교육적 의도를 가지지 않은 경험들까지 확장하더라도 교육에서 교사는 여전히 중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내가 꿈꾸는 교사라는 직업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가치있는 것을 배우고, 그 결과 인생의 질적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 교육이라는 과정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Carry a torch
,